[도서] '히사이시 조의 음악일기' 문장

P53-56 음악이 음악이 되는 순간
석간신문을 읽는데 ‘일본 오케스트라가 세계에서 지니는 위상’이라는 심포지엄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4개국의 신문에 음악평론을 쓰는 평론가 네 명이 도쿄에 모여 도쿄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나서 심포지엄을 열었다고 한다. 네 사람은 뛰어난 연주 기술 등에 칭찬을 보내는 한편 ‘단원의 자발성이 부족하다’고도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인의 성격으로 늘 거론되는 부분이라 나 역시 생각하는 문제다.
내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는 악보를 어디까지 읽어낼 수 있는가, 작곡가가 만들고자 했던 소리를 어디까지 읽어낼 수 있는가에 가장 역점을 둔다. 그래도 역시 피치(음정)나 리듬이 깨지는 것은 신경이 쓰이므로 세심하게 조정한다. 흐트러지거나 틀리지 않는 것이 앙상블의 전제이기 떄문이다. 그런데 피치가 맞고 리듬이 정확하고 강약만 제대로 맞는다고 감동을 주는 연주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음악이 음악이 되는 순간’이란 대체 언제일까? 이것이 무척 어렵다.
작곡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인 시점과 감각적인 시점만 갖추면 음악이 잘 만들어져야 하는데, 사실 그것만으로 음악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곡가의 강한의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만들고 싶다,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뜻, 즉 인텐시티intensity(의지, 결의, 전심)가 필요하다. 연주에서도 이것이 관건이다. 연주할 때는 음악이 음악이 되기 위한 마지막 보루, 즉 마지막 기회가 있다. 바로 본무대다. 관객을 앞에 두면 일종의 비등점에 달한다. 그러면 그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스위치가 켜치고 음악이 된다.
내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일본이나 아시아, 유럽의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보고 다시금 생각하는 것은 현재 일본 오케스트라는 매우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다. 단원 개개인의 기술도 뛰어나다. 좋은 지휘자가 있고 집중해서 연주한다면 어느 오케스트라든 훌륭히 연주한다. 그것을 꾸준히 해낸다면 일류 오케스트라라 할 수 있다.
해외의 오케스트라는 연주자가 저마다 최대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래서 리허설을 할 때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타협하면서 진행한다. 당연히 연주는 중단되곤 한다. 일본의 오케스트라는 리허설이 시작되면 멈추는 일이 거의 없다. 서로 호흡을 맞추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일본 연주자는 피치와 리듬을 맞추려 한다. 자신의 존대를 주장하기보다는 ‘맞추기’에 집중한다. 그래서일까. 결과적으로 좀처럼 웅장한 느낌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는 처음에는 뒤죽박죽이더라도 어떻게든 조율해서 곡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결국은 웅장함을 자아내는 게 아닐까?
중국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 때의 일이다.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자기주장을 하는 바람에 한데 묶기가 무척 어려웠다. 하지만 소리는 낭랑했다. 이런 소리는 일본의 오케스트라에서는 안 나오겠구나 싶은 훌륭하리만치 웅장한 소리였다. 결국 이것도 국민성인가 싶다.
물론 국민성의 차이도 있지만, 오케스트라마다 색깔이 있다. 품위 있는 소리를 낸다든가, 산적 같은 소리를 낸다든가, 혹은 현의 울림이 깨끗하다든가……. 오케스트라마다 연주자가 다르니 당연히 연주자의 개성도 다르다. 그것이 모여 오케스트라의 개성이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하나. 같은 곡을 같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같은 지휘자가 지휘했는데도 녹음한 CD와 라이브 연주를 비교하면 이따금 템포가 다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녹음한 연주는 소리만 듣기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려 한다. 그래서 무척 신중해져서 템포도 정확히 계산해 진행한다. 한편 라이브에서는 연주 당시 오케스트라의 상태, 지휘자의 컨디션, 관객과의 반응, 나아가 그 장소에만 있는 특별한 분위기 속에서 음악이 탄생한다. 이른바 일기일회一期一会(일생 단 한번의 만남)다. 그래서 같은 곡이라도 몇 번이고 다시 들으러 가고 싶어진다. 이때 CD를 복사한 것만 같은 연주가 좋을 리 없다. 때에 따라서는 템포를 빨리 하고, 일부러 격하게 연주하기도 한다. 그런 현장감이 콘서트의 묘미다. 바로 그곳에 ‘음악이 음악이 되는 순간’의 비결이 숨어 있다.
음정, 박자를 모두 지켜 정확히 부르더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다른 게 당연한 건데 왜 악기 연주는 그렇다고 생각을 못 했을까? 하물며 음원이나 영화를 재감상하더라도 보고 듣는 ‘나’의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느껴지는 게 다른데 클래식은, 악기 연주는 왜 그럴 거라는 생각을 못 했지? 암만 관심 가져보려 해도 어려웠는데 뭔가 방법을 찾은 것 같기도?
P138 시각과 청각의 시차는 왜 일어날까?
거리를 걸을 때나 가게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는 반가운 옛 노래를 들었을 때, 그것을 듣던 당신의 다양한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도 많으리라. 하지만 옛날의 그리운 장면을 떠올리고 나서 음악을 떠올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터다.
(중략)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요로 선생이 "스리랑카에 지진이 났을 때(2004년) 쓰나미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코끼리는 일제히 내륙 쪽으로 도망쳤어요. 귀가 '위험해'라고 가르쳐주는 거죠. 그것을 보고 사람도 함께 도망치면 좋았을 것을. 사람들은 우물쭈물했어요. 쓰나미를 눈으로 확인한 뒤 당황해서 도망치려 해봤자 때는 이미 늦었죠" 라고 말씀하셨다. ≪귀로 생각하다≫는 2009년에 출간되었는데, 세계에서 일어난 일의 교훈은 그 후 일본을 덮친 비극에 전혀 활용되지 못했다.
: 진짜 음악을 듣고 과거 기억이나 장면을 떠올리긴 했어도 저 먼 기억 속 장면과 비슷한 상황에서 음악을 떠올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입속에 혀를 아랫니 안쪽으로 두는지 바깥쪽으로 두는지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처럼.ㅋㅋㅋ
: 큰 천재지변이 있기 전 동물들은 미리 움직인다던데 정말 어떻게 가능한 걸까? 궁금쓰. 인간에겐 퇴화거나 사라져버린 어떤 감각들이 동물들에겐 남아있는 걸까?
P258-259 곡은 언제 완성되는가?
그 밖에도 멘델스존, 자코모 푸치니를 비롯해 만년에도 과거의 작품에 계속 수정을 가한 작곡가는 셀 수 없이 많다.
즉 작곡한 작품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다시 연주할 기회와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작곡가는 악보에 손을 대고 싶어질 것이다. 곤란하게도!
역사에 남을 세계적인 음악인들도 완벽을 모르고 일단 마감을 지켜낸 후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근데 내가 뭐라고 단 하나의 완벽한 어떤 것을 위해서 완벽하지 못한 결과가 두려워서 도전조차 망설이는지 새삼 어이가 없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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