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목소리를 드릴게요' 문장

P131

치매 환자들이 지지직거리는 비디오 레코더라면 이 어리고 생생한 뇌들은 8K급 녹화를 해냈다. 벼락치기의 황제들이 나타났다.

 

P133

모든 시험이 오픈 북이 되었다. 시험은 지식 습득의 확인이 아니라 사고 과정과 가치관을 겨루는 장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장기적으로 여겨지고는 있었지만, 새끼손톱 반만 한 파란 알약이 교육 개혁의 원동력이 된 것은 씁쓸했다.

 

P134-135

어린 연인들이 드디어는 고급기기를 구매하지 않고, 두 사람의 가장 소중한 순간에 알약을 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념일을 맞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여간 둘이서 기억하고 싶은 날에 함께 불법 약물을 삼키는 행위는 그럴듯했다. 이들은 수험생 시절 이미 알약을 사용해본 세대였다.

 

P138

고문을 이기고 구출되어 돌아왔지만, 몸의 기억 때문에 계속되는 쇼크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P138

단조로운 고속도로 운전 중에 딴생각을 하지 않는 이는 드물겠지만, 이때의 딴생각이란 단순한 곁가지 생각이 아니라 어떤 완벽한 기억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년 전에서 십수 년 전까지의 기억을 머릿속으로 재생하다가 심각한 교통사고들을 내고 만 운전자들을 아무도 쉽게 비난하지 못했다. 언제이건 약을 복용했던 이들은 종종 자기 머릿속에 갇히곤 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P138

현재성을 압도하는 기억들을 담아두기에 사람의 의식이란 균열이 너무 많은 저수조나 다름없었다.

 

P139

그동안 위험하고 고된 환경에 사람을 갈아 넣어 유지되던 곳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중략) 큰 사고가 계속되자 사람의 영향을 덜 받는 기계 시스템화를 미룰 수 없어진 것이다. 흑자를 많이 보면서도 시설 개선에는 투자를 하지 않던 수많은 기업이 마지못해 변혁을 시작했다.

 

P139

정말 HBL1238 복용자였는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근로 조건이 진짜 원인이었는지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P139

늘어난 설비 탓을 하며 대량 해고를 감행하는 기업들도 없지 않았다. 할 일을 잃은 사람들은 더더욱 기억에 잠겼다. 해고 노동자들 중 몇이 아사한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의지로 단식했는지, 가난으로 굶어죽었는지, 그저 기억에 빠져 먹는 걸 잊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P150

작은 하늘색 알약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동시에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