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상호대차; 내 인생을 관통한 책' 문장

 

 

 

 

 

상호대차; 내 인생을 관통한 책
국내도서
저자 : 강민선
출판 : 이후진프레스 201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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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2

용의 피를 뒤집어써서 불사가 된 몸이 아니라 보리수 이파리 하나 때문에 유일한 약점이 되어버린 자리에 마음이 갔던 모양이다.

 

 

P43

참, 많이도 끼적이며 살았군. 변덕만 부릴 줄 알았는데 무언가를 쓰고, 저장하고, 삭제하지 않은 채 남겨두는 쪽으로는 아주 일관되게 성실했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돌이켜보면 그때처럼 대책 없던 시기도 없었다. 서른이 넘도록 이렇다 할 사회 활동도 하지 않고 안정된 일자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 가족과의 불화도 당연했다. 일기에는 아버지와 다툰 날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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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중국에 있을 때, 쓰다만 여행의 기록들을 얼마 전에 다시 읽었던게 생각난다. 더불어 내 글쓰기의 특징도... 想起来了。오해받기 싫은 내 극렬한 저항일까, 난 항상 사건의 시시콜콜한 것들을 잔뜩 기록했다. 꼭 필요하진 않아도 빠트리면 뭔가 이렇게 저렇게 오해를 남길 것 같단 생각에.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P45-46

그녀에겐 언제나 별일이 없었고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졌는데도 겉으론 안녕하다. 공과 사를 구별하는 지혜와 순발력, 어떠한 위기 상황에도 끄떡 않고 평정을 지키는 튼튼한 멘탈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커리어 아니겠는가. (중략) 헨리가 클리우디아와 나누었던 많은 대화가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죽는 것은 조금도 겁나지 않는다는 말. 그보다 고약한 건 그냥 사는 것, 진정으로 살지 않는 것 이 말이 헨리를 영원히 살게 한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조차도 이 생전의 말 때문에 결코 헛되지 않게 느껴진다. 매 순간 후회 없이 진정으로 살아온 사람일 테니. 그리고 나도 진정으로 살고 싶다. 진정으로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글을 쓰며 살겠다고 작정한 이상 그렇게 살 수밖에. 후회 없이 쓰기 위해 오늘도 노트북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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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없이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들에 온전히 임하는 것. 그게 꼭 열정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번 흘려보내보기를 선택해서 두는 거라면 그건 괜찮다고도 생각한다. 아직 목표도 목적도 세우지 못한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있다. 난.

 

 

P54

읽는 족족 인상적인 문장을 어딘가에 옮겨 적었고 짧든 길든 내 생각을 글로 남겼다. 책과 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이자,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쓸모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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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

 

 

P56-57

배수아에게 번역이란 직업이나 돈벌이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빨리 알려주고 싶은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중략)출간 일정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배수아 작가는 자신이 쓰고 있던 장편소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에 <눈먼 부엉이>의 줄거리 일부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책을 소개했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로 기회를 만드는 작가의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략)

"그렇게 중요한 요소인가요...? 타인을 설득한다는 것이?"

(중략) 타인이 누구인가요? 나조차 때로는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는데...... 나에게 주는 확신이 더 중요해요. 나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건 스스로에 대한 믿음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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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라는 작가에 대해 소개 된 부분이었다. 진심 존멋.

 

 

P76

다만 이 책은 2015년 1월에 초판을 발행한 이후 절판 상태였다. 아마도 더는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직접 손으로 만든 책이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더 이상의 제작을 멈추면 구하려야 구할 수가 없어진다. 이것이 도서관에서 독립출판물을 수서하고 보관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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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이먹고 책을 별로 열심히 읽지 않았던 나로서는 책이 절판되어 읽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더불어 예전에 읽었던 '채링크로스 84번지'가 확 생각났다.

 

 

P85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이 멀리 있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들이 알려주었다. 쉬워보인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삶이 곧 글이 되고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들이 먼저 보여주었다는 뜻이다.

 

 

P92

조심스레 그 서가에 가보았다. 서가마다 독립책방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다 아는 곳이었다. 이제는 친근한 책방 주인의 얼굴이 바로 떠오르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그 서가 어디쯤 내 책이 있다는 것은 더 신기한 일이다. 이런 날이 오다니. 도서관에서 성장기를 보낸 이용자였다가, 도서관 노동자이기도 했다가, 도서관 장서를 만든 사람이 되다니. 무엇보다 피부로 와닿는 실감은 이런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지긋지긋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듯 도서관으로 숨어들지 않아도 된다.

 

 

P134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읽고 나는 질투와 동경과 가난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단어의 뜻을 채 알기도 전에 먼저 체득해버린 어린 기억들이 생각났다. 나 역시 소년만큼이나 가난했고, 선생님은 가난한 학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혹시라도 그럴까 봐 가난한 부모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이것저것을 싸 들고 학교에 찾아왔다. 어릴 때 나는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부모가 싸들고 온 물건들이 내 눈에도 보잘것 없었다는 점이다. 비닐과 테이프, 각종 포장지들....... 모두 아버지 가게에서 아버지가 팔았던 물건이었다.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오래된 나의 과거가 눈앞에 보란 듯이 펼쳐진다. 활자들과 함께 문장과 행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시간 여행, 이것은 독서가 내게 주는 가장 커다란 기쁨이자 슬픔이다.

 

 

P169

결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한 번 읽고 덮으면 그만인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읽어왔고 또 잊어버렸는가. 마치 여름의 정점에서 영하의 겨울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기억하려면 다시 그 계절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살갗으로 느껴야 한다. 그렇게 다시, 이번에는 꼭 기억하리라 마음먹으며 눈으로 활자를 도려내듯 읽어야만 하는 책들이 있다.